
왜 광야에서였을까? 그것은 아마 너무 분주하고 시끄럽고 자기 중심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도시에서는 쉽게 포착 할 수 없는 것들을 광야에서는 듣고 깊이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때로 도시에서는 공적 생활의 날카로운 굉음에 밀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없다. 그리고 도시에서는 때때로 사람들이 하늘을 찌를 듯한 고층 빌딩과 화려한 극장가, 웅장하기 그지없는 교회 건물에 둘러싸여 너무 교만해진 나머지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요한을 광야로 이글어내시고 거기에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렇게 그를 광야로 데려오신 후 요한의 내면 세계에 하나님의 도를 뚜렷이 각인시키셨다. 그 결과 그는 시대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광야에서 요한은 종교와 선악,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자기 세대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일, 즉 아주 특별한 과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특별한 민감성과 용기를 계발하게 되었다. 광야는 그의 내면 세계가 만들어지는 공사 현장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광야에서 요한에게 임했다. 하필이면 그렇게 이상한 곳에서 말씀하시다니. 광야에서 도대체 무엇을 배울 수 있겠는가? 나는 멀리 돌아서 가더라도 가급적이면 광야를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광야는 내게 고통과 고독, 고난을 의미한다. 누구라도 이러한 것들을 좋아하지 안는다. 광야는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살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이 사실은 피할 수 없다. 우리가 고통 가운데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위대한 교훈을 배울 수 있는 곳이 바로 광야라는 사실 말이다.
광야에서 우리는 메마름에 대해 배운다. 광야는 메마른 곳이기 때문이다. 요한은 광야의 메마름에 대처하는 법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그가 요단 강에서 외칠 때 찾아왔던 사람들의 영적 고갈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음이 틀림없다.
광야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의지하는 법을 배운다. 히브리인들이 수세기 전에 깨달았던 것처럼, 광야에서는 자비로운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생명을 부지할 수 없다. 광야와 같은 고초를 겪어 본 사람만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맡긴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광야에는 달리 의지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보다 조금 밝은 측면도 있다. 광야는 개개인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계획하고 준비할 수 있는 장소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요한처럼 그는 그 메마른 땅에서 새롭게 충전되어 메시지를 들고 나타난다. 그것은 사람들의 얄팍함과 위선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메시지다. 그는 인간 영혼의 깊은 밑바닥까지 뚫고 들어가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하여 그 시대의 사람들을 하나님의 그리스도께 이끌어 준다.
광야에서 우리는 부름을 받을 수 있다. 요한은 먼저 자신을 비판하는 자들에게 맞섰고, 훗날 수세에 몰려 광포해진 헤롯 왕 - 헤롯은 부도덕한 생활 때문에 요한의 책망을 받았다 - 에게 대항할 때는 부름받은 사람의 특별한 자질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예언자적 사역을 수행하는 가운데 평온을 잃지 않는 그의 모습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그의 내면에는 무언가 특별한 자질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예언자적 사역을 수행하는 가운데 평온을 잃지 않는 그의 모습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그의 내면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작동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요한에게 독립적인 판단력과 지혜의 기초를 제공해 주었다. 그의 메시지에 맞설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